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니엘 데이루이스 (문단 편집) == 생애 == 1957년 4월 29일 아버지 세실 데이루이스(Cecil Day-Lewis)[* 아버지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혼혈이다. 영국의 계관시인(국가나 왕 등에 의해 공식적으로 임명된 시인)이며, 니콜라스 블레이크라는 필명으로 추리소설도 발표했다. 한국에도 황금가지 밀리언셀러클럽으로 '야수는 죽어야 한다'가 출판되었다. ]의 두 번째 아내인 질 밸컨(Jill Balcon)[* 배우며 유대인으로 다니엘의 외조부 가족이 라트비아와 폴란드에서 이민온 사람들이었다] 사이에서 두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잉글랜드 런던. 그의 외조부는 마이클 밸컨 경(Sir Michael Balcon)으로 영화사 일링(Ealing) 스튜디오의 대표였다. 다니엘의 누나인 태머신 데이루이스(Tamasin Day-Lewis)는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이다. 다니엘이 두 살이 되자 가족은 런던 동남쪽의 [[그리니치]](Greenwich)의 크룸즈힐(Croom's Hill)로 이사갔다. 그리니치에 살면서 다니엘은 런던 남부의 거친 아이들과 살았고 유대인 혈통과 잰 체(posh) 한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곤 했다. 이 때에 다니엘은 런던 남쪽의 억양과 습관, 지역색 등을 남부 출신인양 완전히 익혔는데, 이를 두고 그의 첫번째 ‘연기’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다니엘이 그리니치로 이사 전까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런던 중심부의 Kensington-Chelsea 으로 Belgravia, Westminster, Mayfair 등과 함께 런던 최고의 부촌이다.]. 이 때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으며 좀도둑질 등의 사소한 범죄를 저지르곤 했다고 현재 자주 회상하는 편이다. 1968년 다니엘의 부모는 다니엘이 너무 거칠다고 생각해 켄트의 [[기숙학교]]인 세븐오크스(Sevenoaks) 스쿨로 보냈다. 그는 이곳을 싫어했다. 여기서 그가 그나마 관심을 둔 일은 목공과 연기, 낚시 정도였다. 2년 뒤에 피터즈필드(Petersfield)의 좀 더 진보적인 사립학교인[* 위키피디아 원문엔 independent school로 기재되어 있으며 우리의 대안학교가 아닌 사립학교의 뜻을 갖고있다.] 버데일스(Bedales)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이곳은 좋아했다. 그의 누나도 이곳에서 공부했다. 널럴한 곳이었다고 한다. 14살에 1971년작인 사랑의 긴 여로(Sunday Bloody Sunday)로 데뷔했으나 크레딧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본인은 그 경험이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가 맡은 역은 동네 교회에 주차된 비싼 차를 파손하는 역이었고 그 역으로 2파운드를 받았다고 한다. 1975년 베더일을 떠나면서 그의 제멋대로인 태도는 많이 누그러졌다. 그는 경력을 선택해야 될 나이가 됐다. 비록 그가 런던의 국립청소년극단에서 잘 하기는 했지만 5년짜리 가구공 견습직에 지원했으나 경험 부족으로 반려되었다. 그러자 브리스톨 올드 빅 스쿨(Bristol Old Vic School)에서 연기를 공부했다. 나중에 아버지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Father)에서 함께 연기한 [[피트 포스틀스웨이트]](Pete Postlethwaite)[* 1945-2010. [[유주얼 서스펙트]]의 [[코바야시]], [[인셉션]]의 모리스 피셔 역을 맡은 바 있다.]의 대역을 맡기도 했다. 1982년까지는 영화 대신 브리스톨 올드 빅과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에서 연극을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 [[한 여름밤의 꿈]]에서 플루트 역을 맡았다고 한다] 1982년 처음으로 [[간디(영화)|]]에서 단역으로 성인 연기자 데뷔를 했다. 맡은 역할은 콜린이란 이름으로 주인공을 따돌리는 불량배이나 신경 예민한 엄마에게 맞기나 하는 역. 그 해에 영국의 TV 드라마인 5월의 서리(Frost in May)에 바빌론까지는 얼마나 먼가?(How Many Miles to Babylon?)[* 1차 대전 참전용사가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서 고민하는 역]출연하였다. 82년부터 83년까진 어나더 컨트리(Another Country), 84년 드라큘라(Dracula), 86년 퓨처리스트(Futurists) 등에 출연하였다. 그의 첫 조연은 84년 작인 [[바운티호의 반란(영화)|바운티호의 반란]](Bounty)였고 이듬해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My Beautiful Laundrette), 전망 좋은 방(A Room with a View)에도 조연으로 출연하였다. 뉴욕에서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와 전망이 좋은 방이 같은 날에 개봉하기도 하여 관객과 비평가들에게 그의 다양한 연기폭과 재능을 보여줬다. 뉴욕 영화 비평가는 그를 최고의 조연이라고 불렀다. 1986년 리처드 아이어(Richard Eyre)의 퓨처리스트에 출연하였고 아이어가 TV로 제작한 Screen Two: The Insurance Man 시즌2 7화에 출연하였다. 같은 해, 영국과 프랑스 합작 영화인 나노(Nanou)에 출연하였다. 1987년부터 필립 코프먼(Philip Kaufman)의 1988년작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의 주연을 맡았다. 그 뒤 1988년 정열과 사랑(Stars and Bars)[* 남부 연맹기를 이르는 표현이다. 성조기(Stars and Stripes)와 표현이 비슷하다.]에서 코미디 연기를 했으나 흥행엔 실패했다. 1989년 [[짐 쉐리단]]의 [[나의 왼발]](My Left Foot: The Story of Christy Brown)에 출연하였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당시 후보군이 쟁쟁했는데, '''[[7월 4일생]]의 [[톰 크루즈]]''',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모건 프리먼]]''','''[[헨리 5세(연극)|헨리 5세]]의 [[케네스 브래너]]''','''[[죽은 시인의 사회]]의 [[로빈 윌리엄스]]'''였다.]이 영화는 다니엘이 처음으로 메소드 연기에 몰입한 영화이기도 했다. 그는 영국 국립극장에서 햄릿 역을 맡으며 연극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탈진으로 공연이 끝나자 프로덕션을 떠나야 했다.[* 이때 탈진했다고 알려진 장면이 햄릿이 아버지의 유령을 만나는 장면이라고 한다. 쓰러진 뒤에 미친듯이 울면서 무대에 오르기를 거부했다고. 실제로 본인이 그 때 아버지의 유령을 만났다고 했다고 한다. 데이루이스는 그 때 이후로 햄릿 무대에 오르지 못했고 공식적으로 다른 배우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메소드연기의 무서움이란)] 그리고 그 이후로는 연극에는 나오지 않고 있다. 그는 1992년까지 영화도 찍지 않았으며 1992년 [[모히칸족의 최후(영화)#s-8|라스트 모히칸]](The Last of the Mohicans)으로 돌아왔다. 비평은 모호했으나 박스오피스에서 성공했다. 이후 [[마틴 스코세이지]]의 1993년 개봉작인 [[순수의 시대]](The Age of Innocence)를 찍었다. 이어서 짐 쉐리단과 다시 아버지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Father)를 찍어서 호평을 얻었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션 되었다. 1996년에는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크루서블(The Crucible)을 영화화한 동명의 영화에서 존 프록터(John Proctor) 역을 맡았다. 감독은 니컬러스 하이트너(Nicholas Hytner)였다. 촬영 중에 원작자의 딸인 리베카 밀러를 만나 뒤에 결혼하였다. 이어서 셰리던의 복서(The Boxer)에서 갓 출소한 IRA 조직원이자 전직 복서 역을 맡았다. 복서 이후로 반 은퇴한 상태로 목공 일에 열중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옮겨서 제화 일에 열중했고 제화공 견습을 따냈다. 이 즈음에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니엘은 그 시절을 얘기하는 것을 거부했고 단지 "어떤 형태의 방해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시기였다(It was a period of my life that I had a right to without any intervention of that kind)"라고 술회했다. 5년간 영화를 찍지 않다가 2002년에는 다시 [[마틴 스콜세지]]와 [[갱스 오브 뉴욕]](The Gangs of New York)을 찍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 때 하비 와인스틴과 마틴 스콜세지가 큰 역할이 아니니까 해달라고 사정사정 했다고 한다. 그래서 가까스로 승낙하고 미국에 왔는데 알고 보니 완전 중요한 역할이었던 것....(속았지?) 5년간의 공백이 괜히 깨진게 아니다] 악역으로 갱들의 수장인 윌리엄 커팅(William Cutting), 이른바 도살자 빌(Bill the Butcher) 역을 맡았다.[* 여담으로 배우 본인은 아일랜드 국적도 갖고 있으며, 영국과 아일랜드의 정치적 갈등을 다루고 아일랜드인에 대한 영국 경찰과 정보부의 인권 침해를 다룬 실화 바탕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에 주연으로 출연할 정도로 친아일랜드 성향인 데 반해 도살자 빌은 [[아일랜드계 미국인]]을 혐오하는 인종차별주의자이다.] 그는 이 역을 위해 도살자 견습생 교육을 받았고 촬영 기간 동안 뉴욕 악센트를 유지하며 테이크 사이에 캐릭터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촬영 기간 동안 폐렴 진단을 받았지만 더 따뜻한 코트를 입거나 치료받는 것을 거부했다.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되었으나 [[피아니스트(로만 폴란스키 영화)|피아니스트]]의 [[에이드리언 브로디]]에게 밀렸고 BAFTA에서 주연상을 받았다. 갱스 오브 뉴욕 이후에 아내인 레베카 밀러[* 영화 감독이다]는 다니엘을 자신의 영화인 발라드 오브 잭 앤 로즈(The Ballad of Jack and Rose)의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이 영화에서 다니엘은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되어 왔으며 10대 딸을 어떻게 길렀는지를 후회하며 죽어가는 남자 역을 맡았다. 촬영 기간 동안 "고독"을 느끼기 위해 아내와 떨어져서 살았다고 한다. 영화 자체의 평은 엇갈렸다. 2007년에는 [[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에 출연하였고 무수히 많은 상을 휩쓸었다. 아카데미 주연상도 수상했다. SAG 수상에서 [[히스 레저]]에게 자신의 수상을 헌사하며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레저의 연기가 "특별하고 완벽했다(unique, perfect)"고 평가했다. 2009년에는 [[롭 마샬]]의 [[나인(영화)|나인]]에 귀도 콘티니(Guido Contini) 역을 맡았다. 캐스팅이 화려했는데 평은 그다지이었다. 2010년 12월에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영화)|링컨]]에 [[에이브러햄 링컨]]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권력의 조건(Team of Rivals: The Political Genius of Abraham Lincoln)이라는 책이 원작으로 2011년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서 촬영이 시작되었다. 역을 준비하기 위해 다니엘은 1년을 보냈다. 링컨에 대한 책을 100권 정도 읽었으며 링컨과 비슷한 외모를 연출하기 위해 장시간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일했다. 결국 2013년 제 8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세 번째로 주연상을 수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